만약 평화골이 오늘날까지 계속 불려지고 널리 기념되는 주류 멜로디라면, 신난골은 다케칸의 언더그라운드 인디 음악이라 할 수 있다. 활기찬 붐비는 모습은 없지만 예술과 문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며, 한 번 만났을 때만에도 기억에 남는 비범한 매력을 전파한다. 이는 예술 애호가들을 위한 체험이며, 낡은 골목길 속에서 가슴 뛰는 향수를 느끼는 순간이다. 신난골, 즉 중산골은 평화골에서 단 500미터 떨어져 있다. 평화골의 번화한 상업과 달리, 신난골은 역사적으로 정치·경제·문화를 한데 모아 청나라 말기부터 일제 식민 시대에 이르기까지 웅장한 저택이 모여 있는 고급 지역이었다. 청나라 토지개혁 총국, 일제 지부 사무소, 우체국, 초등학교, 회의장, 무덕관(유교관) 등 정부 기관이 이곳에 집중돼 오늘날 타이베이의 보아이 지역과 비슷했다. 이 구역의 주민들은 부유하거나 귀족이었고, 부유한 상인인 건안유, 일본 상인 가토 진노스케, 학자 유영양(후학) 등 당대의 유명 가문들이 있었다. 골목길에 있는 홀수 건물은 부자들의 저택이었으며, 짝수 건물은 노동자, 창고, 일반 주택이 점유해 부와 가난의 스펙트럼을 거리 수준에서 엿볼 수 있었다. 평화골과 비교하면, 신난골의 건축 외관은 더 웅장하고 호화로운 스타일을 띠며, 중서양 바로크 디자인이 독특하게 혼합돼 있다. 각 건물의 문은 마치 주목을 끌기 위해 경쟁하듯 대담하고 과시적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인 '정교 거래소'는 건안유의 빌라였다. 로마자 이름, 중앙에 있는 동전형 로터나, 대칭의 지붕벽, 서양식 이중 기둥, 그리고 가게 규모의 3배 너비 등은 가족의 막강한 부를 강조했다. 인접한 '용춘'과 '현지' 문은 유명한 유 가문의 저택이었다. 깃털이 펼쳐진 공작새 모양의 지붕은 대담하고 웅장했으며, 물고기, 중국 사자, 퀴(자화), 체스, 서적, 그림 같은 전통적인 중국 조각과 정교한 꽃 모자이크 디자인은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건축 초기에 캔버스로 덮어 복제되는 것을 방지했다는 설이 있다. 신난골을 따라 다른 귀족 가문의 홀도 존재하며, '위이지우주'와 '룽탕 시디' 등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다. 오늘날 다케칸에서 귀족 가문이 쇠퇴하고 후계자들이 이사하면서, 신난골의 과거 영광을 조용히 목격하는 건물 외관과 문문만이 남아 있다. 다음에 다케칸을 방문할 때, 중산로를 우회해 한 번 들러 이야기가 가득한 집을 지나며 다케칸의 옛 화려함을 재발견해 보라.